필리핀 북서부 루손섬에 위치한 비간(Vigan)은 동양과 서양의 건축 양식이 독특하게 융합된 스페인 식민시대의 거리 유산으로,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비간 거리 유산의 역사와 건축적 특징, 문화적 가치, 그리고 보존과 활용의 과제를 중심으로 상세히 설명드립니다.
1. 비간의 역사와 건축 유산의 형성
비간은 16세기 중반 스페인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에서 무역과 행정의 중심지로 성장한 도시입니다. 이 지역은 원래 토착 이로코스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스페인 정복자들이 이곳에 서구식 도시계획을 도입하면서 아시아 전통과 유럽 양식이 혼합된 도시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식민 당국은 마을 중심에 성당과 정부 건물을 배치하고, 주변에 상점과 주택, 광장을 배치하는 전형적인 플라사 중심 도시 구조를 도입했습니다. 그 결과 비간 중심가에는 18세기에서 19세기 사이에 건축된 200여 채 이상의 스페인 식민지 양식의 건물들이 남아 있으며, 이 건물들은 모두 당시 필리핀의 부유한 상인 계층이 소유한 주거지 또는 상업 건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건물들은 대체로 2층 구조로, 하층은 상점 또는 창고, 상층은 거주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석회와 산호로 만든 두꺼운 벽체, 창문을 덮은 나무 셔터, 베란다와 스페인식 타일, 그리고 중국식 기와 장식이 복합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비간의 건축은 동남아 전통 재료와 스페인 도시계획, 중국 건축 기술이 어우러진 독특한 혼종 양식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비간의 중심 거리인 칼레 크리솔로고(Calle Crisologo)는 현재도 당시의 원형이 잘 보존된 구역으로, 마차가 운행되고 전통 상점이 이어지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살아 있는 유산입니다.
개인적으로 비간을 걷다 보면 시간이 정지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돌바닥 거리와 붉은 기와 지붕, 나무로 짜여진 창살이 주는 분위기는 단순한 관광이 아닌, 역사와 함께 숨 쉬는 체험으로 느껴집니다.
2. 동서문화 융합의 상징으로서의 비간 유산
비간은 단지 오래된 건축물이 늘어선 도시가 아니라,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지역 토착문화가 조화롭게 융합된 문화적 실험장이자 성공 사례입니다. 스페인의 도시계획과 종교 전파, 중국 상인의 경제 활동, 이로코스 지방 고유의 생활 방식이 하나의 공간에 조화롭게 녹아들면서, 비간은 필리핀의 정체성과 다문화성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발전했습니다.
특히 필리핀 특유의 ‘바하이 나 바토(Bahay na Bato)’ 양식은 비간 유산의 핵심 요소입니다. 이 구조는 전통적인 ‘바하이 쿠보’(대나무와 야자잎으로 만든 토착 주택)에 스페인 식민지 양식을 접목한 것으로, 튼튼한 석조 1층과 목재로 구성된 2층, 안뜰, 채광창 등이 특징입니다. 이 양식은 필리핀 전역에서 볼 수 있지만, 비간에서는 이 양식이 가장 집중적으로,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세계적으로도 독보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또한 비간은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아카풀코 무역로(Galleon Trade)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며, 중국, 멕시코, 유럽의 문화가 집결되는 국제적인 도시로 기능했습니다. 이는 거리의 상점 이름, 장식 기법, 음식, 복식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혼종성과 융합의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비간은 ‘살아 있는 문화유산’ 이며, 고정된 유물이 아닌, 현재의 공동체가 여전히 거주하고 생활하는 공간으로서 유산의 진정성과 생명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 비간 주민들이 전통 시장에 모이고, 저녁이면 마차가 관광객과 함께 거리를 오가는 풍경은, 유산이 여전히 지역의 정체성과 경제의 일부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비간이 주는 가장 큰 인상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손을 잡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유산이 과거를 보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를 연결하고 조화를 이루는 장이라는 사실을 비간은 가장 설득력 있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3. 보존과 활용의 균형, 비간의 지속가능성 과제
비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 필리핀 문화 관광의 중심지로 떠오르며, 지역경제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분별한 관광 개발과 상업화로 인한 유산 훼손 위험도 커지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관리하고 조절할 것인가가 현재 가장 큰 과제입니다.
특히 칼레 크리솔로고 지역은 관광객 증가로 인해 상점 임대료 상승, 거주지 감소, 전통 상점의 프랜차이즈화 등 여러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관광 수입은 증가했지만, 유산의 정체성과 본래 기능이 상업화에 의해 위협받는 상황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비간시는 ‘비간 유산보존위원회’를 중심으로 도시 보존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정책이 시행 중입니다:
- 전통건축물 리모델링 가이드라인 제정
- 상업 간판 규제 및 외관 통일
- 돌바닥 도로 보수 및 전기선 지중화 작업
- 유산 건축물의 용도 변경 시 사전 심의제 도입
- 전통공예 전수 프로그램 및 해설사 양성 교육
또한 비간시는 지역 대학과 협력하여 문화유산 관리 전문가 양성, 주민 참여형 문화 프로젝트, 관광 수익의 지역 환원 구조 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단지 건물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유산과 지역 주민이 함께 살아가는 모델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기술의 활용도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3D 스캐닝을 통한 구조 보존, AR 앱을 통한 유산 해설, 온라인 아카이브 구축 등은 유산 접근성을 넓히고, 젊은 세대의 관심을 유도하는 데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비간의 사례는 '유산이란 결국 사람이 중심에 있을 때 지속 가능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정책, 기술, 교육이 아무리 훌륭해도, 지역 주민의 동의와 참여 없이는 진정한 보존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비간이 보여주는 조화로운 보존 모델은, 동남아시아 유산 도시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믿습니다.